++ 김달진문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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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김달진문학관
Subject   제22회 시야, 놀자!


시인과 독자와의 만남 22








시야, 놀자!

사회 : 신덕룡 (시인, 문학평론가)

1부 : 초청시인 시낭송회
최동호, 이하석, 정일근, 이달균, 김일태, 김이듬

2부 : 황동규 시인 초청 [시야, 놀자] 프로그램
황동규 『삶을 살아낸다는 건』(휴먼앤북스) 저자사인회

일시 : 2010년 6월 12일(토), 오후 3시
장소 : 김달진 시인 생가 마당
진해시김달진문학관

황동규 자선시 14편 / 삶을 살아낸다는 건



▶ 1938년 평안남도 여유군 숙천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 1958년 [현대문학]에 [시월], [즐거운 편지], [동백나무]가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 시집 : [어떤 개인 날], [비가], [태평가],[열하일기],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몰운대행], [미시령 큰바람],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꽃의 고요], [겨울밤 0시 5분]
▶ 시선집 [삼남에 내리는 눈], [삶을 살아낸다는 건] 외 여럿
▶ 시론집 [사랑의 뿌리]와 산문집 [겨울노래] 외 여럿이 있음
▶ 문학상 수상 : 한국문학상(1980), 현대문학상(1988), 연암문학상(1988) 김종삼문학상(1991),
이산문학상(1991), 대산문학상(1995), 미당문학상(2002), 만해대상(2006), 김달진문학상(2009) 등.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
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
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
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기항지 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꽃 2

나는 나무들이 꽃을 잔뜩 피워놓고
열매가 생기기를
우두커니 서서 기다린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벌이 잉잉거릴 때
꽃들은 먼발치서 달려오는 벌을 맞으러
하나씩 문을 열 것이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마침 파고든 벌을 힘껏 껴안는
이 팽팽함!

배나무나 벚나무 상공(上空)에서
새들은 땅 위에서 환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잠시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을 잊을 것이다.

오미자술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를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비린 사랑 노래 6

가을 들면서 잔 비가 뿌려도
무지개가 제대로 떠지지 않았습니다.
저녁 안개 가끔 낄 뿐
햇빛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는 새 마음이 조금씩 식더군요.
지하철에서 석간을 읽고
읽던 기사 좌석에 놓은 채 일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꽃가게의 꽃들이 풀죽어 웃고 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람 살려!))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

1
뉴욕 한국인 예술제에서 시 낭송을 하고
직장 여자 동료의 친구를 만났다.
무용 공부를 하는 엄마 학생이라고 자기 소개를 한 후
‘명숙이가 선생님 한번 뵈라고 했어요.
모레 서울 갔다 와서
이 주일 후쯤 초대할게요.
남편도 술 좋아하니까
술 대접 한번 하고 싶어요.
우리 사는 아파트는 개미집이지만.‘
(개미는 얼마나 정교하게 집을 짓는가?)
쓰고 있는 둥근테 잿빛 펠트 모자와
검소하지만 색 맞춘 남청색 옷이 잘 어울려
‘참 멋쟁이신데요,’ 했더니
그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 거지예요.’

2
혹시 원효가 미친 척 당나라에 스며들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행색은 어땠을까,
과연 원효가 원효로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시인 김광규가 편지를 보내왔다.
‘이런 괴로운 시절에 망명(亡命) 가신 형이 부럽습니다.’
저런!
망자(亡字)와 명자(命字)가 한자리에 묶여 연주하는 간결한 2중주를
나를 위해 그는 더 짧게 편곡을 했군.
그는 생각했을까,
당나라로 떠나기 전날 원효에게
왜 물그릇이 해골로 비쳤을까?
후에 그의 주특기가 되는 구걸승의 총본산 당나라를
그가 왜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을까?

3
멋대로 신나게 가볍게 살던 의사가
농장 노동자가 되어 죽는 쿤데라 소설 영화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을 보고
의사 마종기와 여주인공 칭찬을 하며
브로드웨이 32번로까지 걸어가 강서회관서 저녁을 먹고
(내 숙소에 가서 식사하자고 했으나 그는 한사코 거절,
‘네가 만드는 밥 어떻게 먹니?’
5년째 미국 사는 동생도 언젠가 한마디로 거절,
‘형님 음식 어떻게 먹습니까?’
그럼 내가 만드는 음식
나는 어떻게 먹지?)
펜 스테이션 입구에서
오랜만에 상냥하게 웃는 여자 거지를 만나
동전 한푼 깡통 속에 던져주고
(한국에는 거지가 없지.
미국은 `복지원'도 없는 삭막한 나라.
참 그 거지는 내가 짓는 음식을 먹을까?)
기차 타고 돌아와
방에 불을 둘이나 켜고
종기 보는 앞에서 손을 두 번 씻고
파 마늘 썰고 고춧가루 깨소금 섞어
양념장 만들어놓고
안주로 순두부를 끓인다.
동향인 자취방 밖에 보름달 환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반 갤런짜리 스카치를 ⅔ 비우고
지구의 회전축도 약간 더 기울여놓고
김영태 욕도 좀 하고
(욕먹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욕하는 자보다 늘 한 수 위이니라)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삶의 얘기들을 하고
사이사이 카세트 틀어놓고 최진희의 노래를 합창하다가
(자취방 밖에는 보름달 환하고)
30대 초반 중국인 여주인에게 불려나가
조용하라는 주의를 받고
간신히 종기를 침대에 눕히고
(간신히 나를 눕혔다고 그는 말하리라)
나는 더 편하게 카펫 위에 자리 깔고 이불 덮고
큰대(大)자로 누워 잠든 사이
꿈속에선 전라도와 경상도가 가볍게 뒤집히기도 하고
우리 탄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기도 했다.

아침이 오자 그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었다.
내 귀여운 술병들을
(종기 위해 새로 구색 갖춘 것들도 있었다),
술병들 앞에 조깅복 입고 수사(修士)처럼 서 있는 나를,
구석에 흉하지 않게 감춰논 내복들을,
그리곤 다시, 벽에 붙여논 한국 지도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중년 사내를,
그 옆에 그가 좋아하는 마크트웨인 사진을,
연출 지시대로 미소를 달았다 떼었다 하며
사진을 찍히다 나는 얼핏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곳은
지옥인가, 연옥인가, 천옥(天獄)인가?
혹은 (이건 단테도 몰랐으리라)
뉴옥(獄)인가?

텔레비에서 본 스웨덴의 일인용 감방 크기만한
자취방에서 증거물을 충분히 수집하고
(지난밤 그는 특히 술병들을 사진 찍어
내 부모님과 아내에게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문지기처럼 문에 세우고 셔터를 눌러댔다.
게으른 문지기처럼
계단에 비스듬히 앉게 하기도 했다.
슬픈 문지기처럼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도 했다.
그리곤 마침 길 건너 서 있는 택시 운전사에게 부탁해서
둘이 같이 찍기도 했다.
둘 다 천옥의 간수들처럼 웃고
(혹은 당나라에 잘못 들어온 원효들처럼 웃고,
30대 중국 여자에게 야단맞은
50대 들어선 사내들 같지 않게 웃고.)

아마 원효는 느낌으로 알았을 것이다.
당나라에서 제조해온 신라인들의 웃음을,
당진에서 배를 타기 전에
그는 기호학(記號學)으로 당나라를 읽었을 것이다.
그날 밤 등잔 심지 돋구고 그는
해골에 고인 물 마시고 다음날 토하는
결정적인 소설을 썼을 것이다.
(동굴 속 해골에 어떻게 빗물이 고이랴?)
사진을 찍고 나서 종기는 나를 몰고
바겐세일 레코드 상점을 찾아 맨해튼으로 나갔다.
지금이라면 원효도 지하철을 탔을 것이다.
우리처럼 빈손이었을 것이다.
(거지의 마음
그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지하철을 내려 지상으로 올라와
헐렁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경주 거리보다 계속 직각으로 뚫려 바람이 세찬 장안 거리를
한없이 작고 가벼운 존재가 되어 걸었을 것이다.

4
후배가 놓고 간 앵초꽃이 물을 잘 받아먹는다.
지나치게 주면 뱉아버린다.
창가에는 놓을 곳이 없어
놓인 곳이 마침 식탁,
밥알도 몇 개 먹여주고
기름 뺀 우유도 몇 방울 먹여주었다.
광선이 모자란 것 같아 애기처럼 팔에 안고
커튼 사이로 햇빛도 조금 쪼여주었다.
날이 지나며 앵초는 꽃과 잎을 하나씩 둘씩 떨어뜨렸다.
놀라워라, 남은 꽃과 잎은 생생했다.
떨어진 꽃과 잎을 종이 냅킨으로 쓸어내며
그 동안 나는 무엇을 떨어뜨렸나 생각했다.
혹시 나는 떨어뜨릴 걸 제대로 떨어뜨리지 못하고
잎과 꽃을 잔뜩 달고 머리끝부터 마르는 그런 꽃이 아닌가?
손을 올려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부서져내리는?
5
뉴욕 사람들은 빨리 걷는다.
서울 사람들보다 빨리, 곁눈질 않고
곧바로 걷는다.
빨간불이 켜져도 틈만 있으면
주저없이 횡단한다.
보도에 잠시 혼자 남았다가
나도 빨간 신호등 켜진 거리를 서둘러 건너간다.

앞서 걷던 사내 하나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두 팔 벌리고 큰 소리로 떠든다.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는 건지,
무기 연기됐다는 건지,
심판관이 바뀌었다는 건지,
잘 식별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발걸음 늦추지 말고 지나가야 하는 건데
일순 발이 멈춰지곤 한다
(원효는 당나라 거리에서 이렇게 멈칫하는
신라인의 발걸음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이번엔 옆에 국적 불명의 원효가 또 하나 서 있다!
서로 흘낏 보고 미소짓는다.

다시 걷는다.
고층 건물이 끝나고 센트럴 공원이 나타난다.
산딸나무와 개능금나무들이 꽃을 미친 듯이 달고 있는
작은 언덕을 넘어 호숫가로 가서 앉는다.
멀리서 오리 세 마리가 놀고 있을 뿐
하늘도 물도 땅도 한가한 오후
편안한 시야 속에 낯선 물고기 하나가 기슭으로 다가온다.
잔 물결이 인다.
바로 눈앞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점 몇 개가 갑자기 튀어 흩어진다.
물벼룩들이로군!
한 점이 달아나다 멈추고 꼼짝 않고 있다.
뒤돌아보는가, 두근대는 가슴으로, 다리 후들후들 떨며?
참, 물벼룩 하나하나에도 심장이 뛰고,
그리고 자기만의 내면 생활이……
햇빛이 수면에서 부서져 무지개색으로 퍼진다.
한순간 허파 한 쌍과 마음 한 채가 몽땅
그 한 점에 깊숙이 빨려들었다가
확 놓여난다.

풍장 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퇴원 날 저녁

흑반(黑班) 잔뜩 끼어 죽어가는 난 잎 어루만지며
베란다 밖을 살핀다.
저녁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다.
주차장에 누군가 차 미등 켜논 채 들어갔나,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
두 등 색이 다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를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 감지 말라고
치운 세상에 간신히 켜논 불씨를
아주 끄지 말라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보통 법신(普通法身)

'그대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른가?'
나무들이 수척해져가는 비로전 앞에서 불타가 묻자
예수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의 답은 이렇네.
마음이 가난한 자와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르지 않은가?'
비로자나불이 빙긋 웃고 있는 절집 옆 약수대에
노랑나비 하나가 몇 번 앉으려다 앉으려다 말고 날아갔다.
불타는 혼잣말인 듯 말했다.
'청정 법신보다
며칠 전 혼자 나에게 와서 뭔가 빌려다
빌려다 한 마디 못하고 간 보통 법신 하나가
더 눈에 밟히네.'
무엇인가 물으려다 말고 예수는 혼잣말을 했다
'저 바다 속 캄캄한 어둠 속에 사는 심해어들은
저마다 자기 불빛을 가지고 있지.'
어디선가 노란 낙엽 한 장이 날아와 공중에서 잠시 떠돌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삶을 살아낸다는 건

다 왔다.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와 둥치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괜찮은 삶도 있었다니!
무엇에 맞았는지 깊이 파인 가슴도 하나 있다.
다 나았소이다, 그가 속삭인다.
이런! 삶을, 삶을 살아낸다는 건……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이 간다.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마을버스 종점, 미니 광장 삼각형 한 변에
얼마 전까지 창밖에 가위와 칼들을
바로크 음악처럼 주렁주렁 달아놓던 철물점이 헐리고
농산물센터 '밭으로 가자'가 들어섰다.
건물의 불 꺼지고 외등이 간판을 읽어준다.
건너편 변에서는 '신라명과'가 막 문을 닫고 있다.

나머지 한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여자가 들릴까 말까 그러나 단호하게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 한다.
가로등이 슬쩍 비춰주는 파리한 얼굴,
살기(殺氣) 묻어 있지 않아 적이 마음 놓인다.
나도 속으로 '오기만 와봐라!'를 몇 번 반복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삶의 맛

환절기, 사방 꽉 막힌 감기!
꼬박 보름 동안 잿빛 공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살다가,
체온 38도 5분 언저리에서 식욕을 잃고
며칠 내 한밤중에 깨어 기침하고 콧물 흘리며
소리 없이 눈물샘 쥐어짜듯 눈물 흠뻑 쏟다가,
오늘 아침 문득
허파꽈리 속으로 스며드는 환한 봄 기척.

이젠 휘젓고 다닐 손바람도 없고
성긴 꽃다발 덮어주는 안개꽃 같은 모발도 없지만
오랜만에 나온 산책길, 개나리 노랗게 울타리 이루고
어디선가 생강나무 음성이 들리는 듯
땅 위엔 제비꽃 솜나물꽃이 심심찮게 피어 있다.
좀 늦게 핀 매화 향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발을 헛디딘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있음!
봄에서 꽃을 찾을까, 징하게들 핀 꽃에서
봄을 뒤집어쓰지.
광폭(廣幅)으로 걷는다.
몇 발자국 앞서 뛰는 까치도 광폭으로 뛴다.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발없이 걷듯

걸음 뗄 때마다
오른편 발뒤꿈치 아프게 땅기는 족저근막염에 걸려
침을 아홉 번 맞아도 통증 기울지 않고
복수초가 피었다 졌을
지금쯤 개나리가 한창일
산책을 두 달여 못 나가고
지난 주말엔 친구들이 부르는 술자리에도 못 낀 채
미술책이나 들척이다가 떠오른 것이
사년 전인가 터키 에베소에서 다리 절면서
‘원 달러, 원 달러!’ 외치며 사진첩 팔던 사내,
물러갈 때 심하게 다리 절름댔으나
사람들 앞에선 알아챌 만큼만 가늘게 절던 사내,
그의 얼굴 어둡지는 않았어.

몇 시간 전 거리에선 사람들 날듯이 걸어 다니고
그들의 삶이 내 삶보다 더 탱탱하고
이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더 탄력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틈 내어 힘들게 내려간 사당역 부근 지하서점 ‘반디앤루니스’ 에선
닷새 전 나온 내 시집 어떻게 꽂혀 있나 살펴보려다 말고
듬직한 미술책 하나 집어 들고 난간 잡으며 올라왔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 남녀가 수화(手話)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턱 높이까지 올린 한 손 두 손 쉬지 않고 움직이고
여자는 두 손 마주 잡고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발길 옮기려다, 아 여자 눈에 불빛이 담겨 있구나!
여자가 울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기쁜 표정 담긴 얼굴이
손 없이 수화하듯 울고 있었다.
나는 절름을 잊고 그들을 지나쳤어.


최동호 초청시인 시낭송회 :「돈암동 시장 파 할머니」외 2편


▶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 동대학원 문학박사. 현재 고려대 문과 대 국문과 교수.
▶ 시집으로 [황사바람], [아침책상],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공놀이하는 달 마], [불꽃 비단 벌레]가 있으며
▶ 소천 비평문학상(1991), 시와 시학상(1996), 현대불교문학상(1996), 김환태비평문학상 (1998), 편운문학상(1999), 대산문학상(2006), 고산 윤선도문학대상(2009) 등을 수상하였 다.

돈암동 시장 파 할머니

돈암동 시장 어귀
매일 아침 파를 다듬는
할머니가 있었다 일 년 내내
고개를 들지도 않고
파를 다듬는 할머니는 도통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파를 다듬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매일 아침
채소 가게 어귀에 나와
머리가 하얀
파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한 번도 고개를 들어 행인을 보지 않고
언제나 구부린 자세로
파를 다듬던 할머니가
어느 날,
얼굴을 들어 모래 섞인
꽃샘바람 지나가는
시장 어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다듬은 파처럼 단정하게,
흙 묻은 손으로 머리칼 쓸어 올리는
파 할머니 작은 얼굴에서 흘낏
돌보다 강인한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시집 [불꽃 비단벌레](2009)에서

명검을 전하는 이야기
- 설악산 노 스승의 명검

검의 집에서 일단 검을 뽑으면 그것은 검이 아니라 칼이다. 제 집 속에 있는 검이야말로 최고의 명검이다. 무딘 쇠를 갈아 날을 세우면 검을 다루는 정신은 이미 녹이 슨 것이고, 세상을 향해 검을 휘두르게 되면 이미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 피를 부르는 칼이 되고 만 다.
검은 살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생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날을 세우면 반드시 그 날카로움에 사람의 몸이 다치게 된다.
제 집 속에 들어 있는 검이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고 태산을 울게 한다. 그 이치 를 터득한 사람은 검을 뽑지 않아도 검을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니 그 사람에 게는 검이 필요 없다. 그래도 검을 앞에 놓고 살아야 하는 것은 검을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경계하기 위함이다.
날카로운 칼의 길을 구하는 자에게 전부터 내려오는 명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부질없 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낡은 검 집 속의 검보다 더 시퍼런 명검을 후인에게 전하기 위해서라고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시인세계] 2010년 여름호

아름다운 공부

초겨울 바람이 부는 날 목포 지원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싸 늘한 바람에 외투 깃 올리고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 비추는 길을 따라 친구 찾아가고 있었 는데 문득 어두운 가로등 밑에서 거지 아버지가 아들을 앞에 놓고 공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트를 펼쳐놓고 무언가 아버지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고 있는 거지 아들의 모습이 눈에 비치는 순간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고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40 여년 후 히말라야 삼천 오백 미터 지점에 있는 푼 힐 고지를 올라갔다, 3박 4일의 고된 산행으로 인해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내려 오는데 쓰러져가는 움막집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아이에게 공부 가르치는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어둔 방안을 감싸고 있는 환한 빛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나를 돌아보고 싱긋 웃고 있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산정 높이 하얀 구름 떠 돌던 하늘호수 같았다.
멀리서 공부하는 딸아이에게서 올 소식을 기다리는 침침한 겨울날 옛날 중학생 시절에 보 았던 아버지와 아이의 그림자가 하늘호수에 비취고 있었다.
[열린 시학] 2009년 가을호


이하석 초청시인 시낭송회 :「편지의 꿈」외 2편.


1948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1971년 [현대시학] 시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측백나무 울타리],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녹] , [것들]과 산문집 [우울과 광휘]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대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편지의 꿈

송전탑 아래서 에코나비고*의 유충을 줍는다. 예쁘다. 아파트 거실 텔레비전 옆에 두니 몇 번인가 허물을 벗은 다음 날개까지 난다. 어두운 구석에 알들을 슬어놓는다. 자주 날려보내고 쓸어낸다. 그러나 이미 바퀴벌레보다 더 교묘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그 기계충들이 점령했음을 안다.

편지를 꼭 우체국에 가서 부친다면 이메일들을 저것들이 먼저 점검하고 소리의 색깔까지 씹어대는 게 기분 나쁘기 때문이리라. 나도 자주 핸드폰 밧데리를 뽑고 컴퓨터를 끈다. 그러나 그걸 끝내 버리니 못하니, 나도 그 기계충들에 사로잡힌 셈이다. 형형색색의 기계충들을 애완으로 기르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그런 내게 자주 연락두절을 투덜댄다. 그 투댈대는 소리의 전파를 야금야금 파먹는 기계충들의 이빨이 가지런하다.
* 안테나 주위에 살며 송수신 전파를 먹고사는 기계충. (최우람의 작품에서)

몽유도원도

땅이 없으니 하늘 쪽이라도 개간하는 겐가

산동네에 세들면 옥상에 알루미늄 박스랑 플라스틱 바케츠랑 깡통들부터 늘어놓는다

빈 수프 깡통까지 밑구멍 뚫어 흙 담아놓으면 상치밭 된다

봄엔 복사꽃 두어 송이 갈색 페인트 깡통에서 피어올라 무릉도원이라 불리더니

높은 지대라 나팔 불기 좋은 곳 아니냔 듯 페트병에서 솟아난 부지런한 나팔꽃 덩굴 옥상 난간 감아 올라 여름 알린다

채소들 연일 뜯어내도 흙심 좋아 이내 새로 푸르게 솟아나고,

도꼬마리, 개망초, 속새 씨들 바람길 떠돌다 아무 깡통이나 플라스틱 통들에 왁자지껄 뿌 리 내려 수북하니 숲 이룬다

밖은 뜨거워도 옥상 풀숲엔 맹수 고양이족 서식하는 서늘한 어둠이 있어서

대도시 사막 건너온 이들 숨어드는 오아시스라 불린다

저 아랫동네 먼지세상에서 낙타보다 편리한 기계 부리는 이들이 꿈꾸는 것도 흙바람 뚫고 솟은 무릉도원 아니겠는가

그러나 꽃들 구름처럼 피어나는 이 몽유의 높이를

저 아래 사막세계의 현자들은 못 찾겠지

끊임없이 자잘한 꽃 피워 넘보는

아슬아슬한 몽유길이여

옥상 난간 벼랑에 나팔꽃 새순이 내는 위태로운 잔도가 꿈길이어서

산동네 사람들 하늘 향해 떠들어대며 꽃 피는 아침이 늘 그 길로 오신다

해우 (解憂)

높은 곳의 볼일은 훤히 열어놓고 본다. 팔공산 오도암 사립문 밖 천인절벽 위에 걸쳐놓은 측간에서 푸는 게 그러하다. 양철 조각들로 동남북을 얼추 막았으나 서켠을 청산 쪽으로 확 틔워놓아서, 거기 앉으면, 똥 누는 일도 아슬아슬한 절정에서 제 몸과 정신을 열어제키 는 일이라 여겨진다.

절벽 위에 걸터앉아 저 아래 골짜기 구름 피어오르는 것 헤아리면, 솔 바람이 건넌 산 능 선 넘어와 내 아래를 씻는다. 금방, 더 내려보낼 게 없다. 그렇게 문득 일대사를 마친다. 멀리 내다보며 몸 추스르고, 내 것 떨어져내려간 절벽 아래 상수리 새싹 트는 비탈 내려다 본다.


정일근 초청시인 시낭송회 :「사랑할 때 사랑하라」외 2편.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등 여럿,
시조시집 [만트라, 만트라] 등 여럿이 있으며,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월하진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사)한국작가회의 이사, 열린시학회 회장이며, 경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랑할 때 사랑하라

사랑할 때 사랑하라

아홉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팔 하나를 내어주어도

남은 손가락, 남은 손이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이

두 눈알을 다 가져가버려도

사랑이 몸뚱이만 남겨놓아도

사랑이 남아있다면 사랑하라

지구별에 다시 빙하기가 오고

지구가 두꺼운 얼음에 덮여

검독수리가 죽고

향유고래가 죽고

흰 민들레가 죽고

오직 외발 하나 딛고 설 땅이 있다면

그 땅에 한 발 딛고 서서

나머지 한 발은 들고라도 서있을 수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은

용서보다 거룩한 용서

기도보다 절실한 기도

아무 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도

사랑이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할 때 사랑하라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리며

김씨의 하관下官은 정오에 있을 것이다.
붉은 흙더미 사이에 광중壙中이 파여 있다.
반듯한 직사각형 저 죽음의 깊이까지
뜨거운 햇살이 들끓는다.
코끝이 빨간 풍수風水의 음양오행은
아침부터 대책 없이 취해있다.
상복을 걸친 생면부지의 여자가
걸어놓은 솥에 관솔로 불을 지핀다.
물보다 생송진이 먼저 비등점에 닿는다.
핏물이 말라가는 쇠고기 덩어리
무정형의 슬픔 같다는 생각은 사치 같다.
누런 갈색의 쇠파리가 피 냄새를 맡았나보다
앵앵거리며 달려든다.
무덥다. 열대야가 예고된 폭염의 세례를 받으며
주검이 느릿느릿 오고 있다.
김씨의 관이 차에 실려 장지로 오는 사이
죽음의 의식儀式이, 눈물의 조문弔問이
땀에 젖어 불쾌하게 번들거릴 뿐이다.
머리 속이 소금사막처럼 하얗다.
그에게 읽어줄 마지막 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백지를 들고 정오 아래 서 있다.

흑백다방

오래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 뜨거워진다면
흑백다방, 스무 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쿵쿵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차고 유폐될 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 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로터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

memento mori,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그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향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의 속의 흑백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since 1955 흑백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이달균 초청시인 시낭송회 :「평사리행 국도에서」외 2편.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87년 [지평]과 시집 [남해행]을 출간하여 문단활동을 시작하였고, 1995년 [시조시학]신인상 수상으로 시조창작을 병행하였다.
시집으로 [말뚝이 가라사대], [장롱의 말], [북행열차를 타고]등이 있으며,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경남문학상 외 여럿을 수상하였다.

평사리행 국도에서

살아있는 것들은 죄다 반짝인다
재첩을 줍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분주한 한 떼의 송사리들처럼
강의 비늘은 살아서 반짝인다
강물은 늘 그 자리에 있어 왔지만
오늘은 내 여기 있다 여기 있다 손을 흔든다
물끄러미 가을 햇살들이 뒤돌아보는 평사리행 국도
나는 돌아갈 집을 잊기로 했다
눈 떠 있는 깨진 사발의 영혼처럼
나도 함께 반짝이며 어울릴 순 없을까
사납게 사라지는 버스, 두껍고 짙푸른 잎새
살아서 빛내는 오후는 아름답다
재첩이 여무는 날에 나란히 배들이 익어가듯이
아무 것도 혼자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 왜 살아있는 것들은
내 여기 있다 외치며 해종일 반짝이는가
존재의 고단함 역시 산자의 몫이 아닌가
외로워서 반짝이고 싶은 나를 거기 세워두고
황혼 속에 파묻힌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

가을이 깊어갈수록
아버지의 해소병도 깊어갔다
나는 그 가을과 상관없이 키가 자랐고
병문안 오는 사람들을 숨어보면서
하얀 알약처럼 한 철을 보냈다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꽃밭에 꽂힐 때마다
새들은 눈부신 갈대꽃이 되기도 하였다
가을의 끝에서
한 쪽 폐를 도려낸 아버지가 오셨다
아버지는 하얗게 웃고 계셨다
어머니는 남아 있는 폐를 위해
기도 하셨지만,
나는 버려진 폐를 위해
휘파람을 불었다
세상의 오래 묻은 때들을 잘라내고
바람에 뼈를 말리시던 아버지
죽음도 그렇게 불현듯 올 것인가
그 가을의 햇살은 사금파리들을
잘게 부수어 내렸고
나는 신열 속에서 한 철을 보냈다

뻐꾸기 둥지 속의 모노드라마

지금쯤 그이는 수술을 끝냈을 시간입니다
맞은편 옥상 위의 구름이
해체된 정신처럼 역겹다고 칭얼대고 있겠지요
나는 오전 일과의 마감을 알리고
정갈한 모이와 영양제 몇 알을 씻어놓고
소박한 행복에 취해보기도 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죽은 아이를 낳는 소녀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습니다
쓰다 버린 메스로
알뜰히 과일을 깎아놓고
알맞게 말려둔 태아를 달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살림에
재미를 느껴가는 나를
친구들은 부러워하는 눈치입니다
참, 이제 오후 일과의 시작을 알려야겠죠
간혹, 그이는 쇼팽을 듣다가 잠들어 버리는
탐미적인 남자거든요

※ 뻐꾸기 둥지: 켄 키지(Ken Kesey)의 소설‘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제목을 차용하였다.
1975년 영화화 되었다.


김일태 초청시인 시낭송회 :「파도의 속성에 관하여」외 2편.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시와시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그리운 수개리], [호박을 키우며], [어머니의 땅], [바코드속 종이달]이 있으며,
창원시문화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시민불교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창원예총회장, 경남문협부회장, 고향의봄기념사업회 회장, 이원수문학관대표이며 마산MBC 기획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파도의 속성에 관하여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던져 버리는 일

세상이 빛을 비운 뒤에도
홀로 깨어
속내 일며 다가가서
맨살 맞대 보는 것

나직나직 가슴 부비며
뭍이 바다와 만나는 소리

모래톱 짓듯
사랑은
짭조름히 서로에게 배어드는 것

질膣을 내며
뭍이 들이칠 때마다
솟구치며 쏟아내는
환호성 같은 것

사랑은, 그대 있는 샅샅에 나를 두어
절절하게 꽃이 되는 일
하얗게 피어서 부서지는 일

부서진 나를 낮게 거두어
야무지게
다시 그대 앞에 세우는 일

참새를 잡고 싶다

소쿠리 덫 괴 놓고 기다리다 잠들었던
아홉 살 되던 봄날로 가고 싶다
꿈에 참새가 된 내가
동무들은 날아가고 홀로 잡혀
무명실에 다리 묶여 혼이 나던
그때로 가고 싶다
남지장 가신 어머니 더디 오신 그날
참새처럼 오그린 등 토닥여 선잠 털어주던
그 어진 볕살 올올이 가슴으로 사리다가
쫑쫑 맨땅에 입방아라도 찧고 싶다
내가 비운 사이
흙좋은 나의 안마당을 차지한
잡풀들 싸리비로 쓸어내고
사십 년 시간 뒤꿈치 들고 건너가고 싶다
나긋나긋 양지 녘에 괴놓은 유년의 덫 속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미끼 뿌려놓고
한번 쫓겨 가서는 쉬이 돌아오지 않던 참새들을 기다려
사월의 하루해처럼
저물고 싶다



정수기 육각수로 헹군 상추에 메뚜기쌀밥 흑돼지삼겹살
조선된장에 마늘 풋고추를 얹어
우리들 사는 것도 이런 게 아니냐며
잘 산다는 것과 잘 싼다는 것은 같은 말이라며
세 식구 마주보고 미어지게 쌈을 먹는다

당당하게 쌈질해서 얻은 쌈을 생각하는데
요 정도 쌀 수 있는 형편이 얼마나 고마우냐고
아내가 맛나게 웃는다

여남은 식구 건사하느라
솥바닥 눌은 숭늉 불려 마시거나
밥알 없는 헛쌈 드시고는
가족들 밥 먹는 사이 동생 들쳐 업고 남새밭 돌다 오시던
사는 동안 당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속차게 싸본 적 없는
헛쌈 같은 어머니

김이듬 초청시인 시낭송회 :「언니네 이발소」외 2편.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경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1년 계간 [포에지]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이 있으며, 현재 경상대, 진주산업대에 출 강하고 있다.

언니네 이발소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한 건 순전히 한 사내 때문이었죠 흙먼지 뒤집어쓴 머리를 쑥 내밀 며 막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같았어요 나는 도로 묻히려는 그 사내를 다독거려 백일 홍 가지에 약속을 걸어두고 맞은편 이발소로 데려 갔어요 육계 머리칼을 뜯어 비눗물에 담 그고 문질렀지요 빳빳하던 머리칼이 파래처럼 부드러워졌어요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의 튀 어나온 눈이 따가울까봐 나는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닦아냈지요 매일 머리를 감겨 달래면 어쩌나 화를 내면 어쩌지 내가 도로 사내의 팔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노을 지고 백일홍 꿈결같이 졌네요

         어디쯤이었을까

나는 사내를 끌어올린 구덩이를 찾지 못하고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듯 도로를 헤집는데 사 내는 일을 마친 성기처럼 안으로 쑤욱 들어가 얼굴만 석인상이 되었네요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 몇 번씩 닦아드려요
        어디쯤에서 잘못 되었나 고민하다가
        광한루 지나
        만복사지 옆 비탈길에서
        비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 될까요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나의 열쇠는 피를 흘립니다 내 사전도 피를 흘립니다 내 수염도 피를 흘리고 저절로 충치 가 빠졌습니다 내 목소리는 굵어지고 주름도 굵어지고 책상 서랍의 쥐꼬리는 사라졌습니다 소문대로 난 일 년의 절반 지하실과 지상을 공평하게 떠돕니다

나의 눈에서 물이 흐릅니다 한쪽 눈알은 말라빠졌습니다 두 다리의 무릎까지만 털이 수북 합니다 음부의 반쪽에선 생리가 나오고 오른쪽 사타구니엔 정액이 흘러내립니다 백 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만

하하하 농담 그냥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라는 말을 요즘 유행하는 환상적 어투로 지껄인 겁니다 말도 하기 귀찮다는 예 바로 그 말입죠

자자 내게 제모기와 쥐덫은 그만 보내시고요 이가 들끓는 가발도 처치곤란입니다 도려서 얹어놓은 과일들 이 모든 쓰레기는 충분해요 머리맡에 양초든 향이든 피우지 마세요 죽겠 네 정말 꽃무더기 따위 묶어오지 말라니까요

죽은 장미가 그랬죠 너는 아름답구나

지금은 뼈만 남은 늙은이와 놀다 쉬는 참입니다 매일 한두 명과 그러고 그러지만 어떤 날 은 여자애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정신이 나갑니다 공동묘지로 허가 났나요 전기가 끊어지 고 수도관이 막힌 지도 한참 됐어요 하긴 정신차린다는 말의 뜻도 모르지만 제발 축언은 닥치고요 축복도 그만 좀 주세요

지하실엔 매달 공간이 없답니다 정원에도 파묻을 자리가 없구요 누군 나더러 불러들였다는 데 제 발로 찾아와 발가벗는데 난들 별 수 있나요 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내게 없는 걸로 주세요 가령 고통이니 절망 허무랄까 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전에만 있는 그 말의 뜻이 통하게요 안 될까요 그럼 견딜 수 없는 같이 흔해빠진 문구를 써먹을 수 있는 어쩌구 저쩌구 혹은 질투라는 단어에 적합한 대상을 보내주세요

누가 봤을까요 나도 날 못 봤는데
그러나 나는 아름답네요

거리의 기타리스트
―돌아오지 마라, 엄마

길거리의 여자는 기타를 껴안고 있다 젖통을 밀어 넣을 기세다 어떻게든 기타를 울려 구걸 해야 한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더 조급해진다 기타의 성기는 소리이므로 딸을 걷어차기 시 작한다
착지가 서툰 빗줄기는 보도블록에 닿자마자 발목을 부러뜨렸다 비가 지하도를 기어간다 질 질 끌려간다 난폭한 여자의 팔에 기타가 매달려 있다 걸을 수 없는 조건을 가졌다
담배를 물려다 말고 여자가 소리를 만지작거린다 기타는 여자를 경멸하므로 여자를 허용한 다 자라지도 않고 떨림도 없는 기타의 성기에는 매듭과 줄이 있다
스무 장의 신문지와 스물 한 개의 철근이 뒹구는 지하실이다 팔백 해리의 슬픔과 팔백 해 리의 공복과 백만 마일의 바퀴벌레도 늘어나는 것이 죄인 줄 안다
기타리스트는 딸을 안고 있다 다시 보면 기타가 여자를 껴안고 있는 자세다 기타는 기타리 스트의 목을 조르고 있다 죽을까 말까 망설이느라 성장을 못한 딸의 손목이다
잔느 아브릴의 어머니는 딸에게 매춘을 강요했으며 기타처럼 모성이란 다양한 것이다 여자 는 얼떨결에 기타를 갖게 되었다 여자는 기타를 동반하여 계단을 굴러가고 난간을 넘어가 세상을 추락한다 놀랍게도 어떤 모성은 잔인한 과대망상이다
기타는 기타케이스 안으로 기타리스트를 밀어 넣는다

찾아가는 시인, 찾아오는 독자의 만남

제 01회 초청시인 : 권혁웅, 김 륭
제 02회 초청시인 : 서정춘, 조은길
제 03회 초청시인 : 강은교 (마산무학여고)
제 04회 초청시인 : 유홍준, 박서영
제 05회 초청시인 : 최동호, 우무석
제 06회 초청시인 : 김기택, 김이듬
제 07회 초청시인 : 유안진 (마산제일여고)
제 08회 초청시인 : 강희근, 김지유
제 09회 초청시인 : 임신행 (진해안골포초등학교)
제 10회 초청시인 : 이정록, 손순미
제 11회 초청시인 : 문인수, 성선경
제 12회 초청시인 : 신형건 (진해안청초등학교)
제 13회 초청시인 : 이하석, 황명강
제 14회 초청시인 : 신달자 (마산제일여고)
제 15회 초청시인 : 이월춘, 여태천
제 16회 초청시인 : 정일근, 안화수
제 17회 초청시인 : 신현득 (거제선상크루즈)
제 18회 초청시인 : 송수권, 오인태
제 19회 초청시인 : 박주택 (마산제일고)
제 20회 초청시인 : 신경림, 이우걸
제 21회 초청시인 : 복효근 (진해용원중)
제 22회 초청시인 : 황동규, 최동호, 이하석, 정일근, 이달균, 김일태, 김이듬 (김달진 생 가)

시인과 독자와의 만남 22

시야, 놀자!

발행일 2010년 6월 12일
발행인 이 성 모
편 집 진해시김달진문학관
주 소 경남 진해시 소사동 43번지
전 화 055) 547-2623 Fax: 055)547-2624
홈페이지 http://dalj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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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시야, 놀자! 초청시인 - 신덕룡·배한봉 김달진문학관 2015/10/29  1459
121    제20회 김달진문학제 초대합니다 김달진문학관 2015/08/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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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제11회 김달진창원문학상 공모 및 심사 김달진문학관 2015/06/08  1915
118    2015년 어린이 작가 꿈다락 교실 수강생 모집 김달진문학관 2015/03/20  2335
117    2014년 "내 생애 첫 작가수업" 무료 수강생 모집 김달진문학관 2014/08/01  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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